한국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
고종과 조선 정부는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국가 차원의 개화 프로젝트를 세우고 그 실천에 나섰는데, 이때 의료분야의 근대화에도 주목했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을 통해 서양식 의료를 탐색했다. 1884년 정부 기관지 《한성순보》를 통해 백성들에게 서양의학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다. 같은 해 미국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는 이를 허락했다. 즉 고종과 조선 정부가 서양식 국립병원을 설립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마침내 1885년 4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중원은 의료기관인데도 특이하게 외아문(外衙門, 오늘날의 외교통상부) 산하에 설치되었다. 당시 정부 조직 편제상 오늘날의 보건복지가족부에 해당하는 관서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외교통상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에 소속된 것은 특이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동문학同文學, 박문국博文局 등 서양문물 도입기관이 외아문 관할에 속했던 것과 비슷하다. 제중원을, 단순히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는 기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서양의 새로운 의학지식과 의술을 도입하고 학습하는 기관으로 삼고자 한 판단이 깔려 있다. 실제로 조선 정부는 제중원 개원 1년 후 ‘제중원의학당’을 설치하여 조선인 양의사 양성을 모색했다.

이 국립병원의 당초 명칭은 ‘광혜원廣惠院’이었으나, 고종과 조선 정부는 14일만에 이를 무효화하고 ‘제중원濟衆院’이라 명명했다. 충북 음성군과 진천군 경계지역에 광혜원(한자도 똑같음)이라는 지명이 있어서 혼동을 피하고자 했던 것 같다. ‘제중’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준말로,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제중원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홍영식의 집(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에 살해당한 홍영식은 역적이 되어 있었고, 그의 집은 자동적으로 국가 재산으로 귀속되어 있었다. 즉 고종과 조선 정부가 국유지를 제중원 부지와 건물로 사용하도록 결정한 것이며, 아울러 병원으로 쓸 수 있도록 수리하고 개조하는 비용을 부담했다. 이곳을 편의상 ‘재동 제중원’이라 부른다.

1886년 11월경, 제중원은 구리개(銅峴, 지금의 서울시 을지로 입구)로 이사했다. 알렌이 이전을 건의했지만, 부지와 건물을 결정하고 모든 이전작업을 주관한 것은 조선 정부였다. 부지는 넓었고, 서울 한복판에 있는 언덕 위에 있어서 시내 전체는 물론 외곽지역까지 조망할 수 있었다. ‘제중원의학당’ 강의실로 사용할 건물도 크고 환기가 잘 되었으며,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을 편의상 ‘구리개 제중원’이라 부른다.

당시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한 의료선교사들 역시 제중원을 국립병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885~1890년 제중원에서 의사로 일한 헤론(John W. Heron)은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6년 2월 12일자 편지에서 “병원(제중원-필자 주)이 정부병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병원에서 일하는 것이 순탄한 방도이고, 조선 정부의 신뢰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라고 제중원의 상황을 보고했다. 알렌과 헤론은 1886년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 본부에 제출한 것으로 보이는 제중원 관련 보고서에서 제중원을 ‘조선 정부병원(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이라고 지칭했다. 결국 제중원은 국립병원이었음이 확실하다.

조선인 환자들, 제중원에서 치료를 받다
제중원에서 치료한 환자는 대체 얼마나 되었을까. 1886년 알렌과 헤론이 작성한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제중원은 첫 1년 동안 1만 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그런데 이 수치는 다소 과장된 듯하다. 같은 시기의 《한성주보漢城週報》 기사를 근거로 1년 동안의 진료 실적을 추산해보면 3,500~7,000명 선이 된다.

제중원 초장기의 환자들을 보면, 일반 백성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걸인, 나병 환자부터 위로는 궁중의 귀인까지 조선의 전 계층이 망라되어 있었다. 여성 환자들도 800명이 넘었다. 양반층은 주로 왕진을 요청했으며, 지방에서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1885년 4월 제중원 개원 후 제중원에서 진료를 받은 환자들은 대개 어떤 질환을 앓고 있었을까? <조선정부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다. 제중원 개원 후 1년 동안 진료한 환자에 대한 상세한 통계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제중원에서 치료했던 주요 질병을 살펴보면, 말라리아가 가장 흔했다. 매독은 말라리아 다음으로 많았는데, 그 증상이 매우 다양했다. 그밖에도 소화불량, 각종 피부병, 결핵, 나병, 기생충병 등이 많았다.

제중원에서 조선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약은 ‘금계랍金鷄蠟’이었다. 바로 열 알에 엽전 500푼을 받은, 말라리아 치료약 키니네다. 제중원을 찾는 환자들 중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치료약인 키니네가 제중원에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중원 운영권은 왜 미국 북장로회에 이관되었나?
1894년 9월, 제중원이 문을 연 지 9년 5개월 만에 고종과 조선 정부는 에비슨의 요구를 수용하여 미국 북장로회에 제중원 운영권을 이관했다.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을 운영하겠다는 구상은 어디로 가고 이런 결정을 내려야 했을까.

1894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해였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전쟁, 그로 인해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일본이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갑오개혁. 세 사건 모두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국제관계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대사건들이었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그 중 어느 한 사건만 일어났어도 감당하기 어려울 판이었는데, 세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해버린 사건은 고종에게는 치명타였다. 고종은 국왕으로서의 자존심과 권위에 큰 타격을 입고 자연인으로서의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아야 했다. 조선 정부도 온전한 정부로서의 권위와 기능을 상실한 채 일본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조선 정부가 제중원 운영권 이관을 공식 승인한 날짜다. 즉 1894년 9월 26일은 일본에 의한 타율적 개혁인 갑오개혁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즉 일본이 조선의 국정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일본이 사실상 국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제중원을 일본에게 빼앗기는 것보다는 미국 북장로회에 운영을 맡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더구나 고종과 온건개화파 관료들은 일찍부터 미국이 사심私心 없이 약소국 조선을 도와줄 수 있는 나라라고 기대했던 만큼, 청일전쟁 국면에서 미국에 무언가 도움을 청하기에 제중원 운영권 이관이 유리한 카드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일본도 조선을 순조롭게 장악하고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외교적으로 미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중원 운영권 이관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론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1895년 2월 내무대신 박영효가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에비슨(Oliver R. Avison)에게 명성황후의 지원을 받는 국립대학 설립 구상을 상의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영효가 국립대학 설립을 선교사업으로 ‘위장’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국립대학을 조선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사업으로 시작하면 일본인들의 간섭을 받아 실패하거나 그들에게 학교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서였다. 이로 미루어볼 때 고종이 미국 북장로회에 제중원 운영권을 넘겨준 것은 조선 정부가 계속해서 제중원을 운영할 경우 일본인들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했던 데서 나온 고육지책일 가능성이 높다는 데 더욱 심증이 간다.

제중원은 왜 중요한가?
우리나라 근현대 의료사, 특히 서양식 의료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8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이 개원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중원은 고종과 조선 정부가 19세기 조선의 제반 의료 상황에 대처하여 서양의학 도입을 능동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1877년 부산에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서양식 병원이 등장했고, 1879년 송촌 지석영이 역사적인 종두 시술에 성공했지만, 왕조시대였던 만큼 어명으로 서양식 병원이 설립되어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든 백성을 상대로 서양식 의료를 펼치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근대 의료사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제중원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한국 근대 서양의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우선 대한제국 정부의 의학교와 광제원을 통해서였다. 정부와 한국인들이 제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은 의학교와 광제원 등 국립 의료기관의 건립과 운영, 나아가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의학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경로는 세브란스병원을 통한 것이었다. 제중원에서 일했던 여러 의료선교사들의 경험은 개신교가 설립하고 운영한 세브란스병원의 발전뿐만 아니라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의학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글•사진•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사진•문화재청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