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에 대한 특별한 인상印象
마라톤은 흔히 삶에 비유된다. 지난하고 긴 과정, 자신만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달리고, 달려야 결승점에 다다를 수 있다. 그 안에서 빛을 발하는 끈기는 마라톤뿐만 아니라 삶을 사는 데 있어서도 꼭 갖춰야 할 요건이다. 노력을 전제로 한 레이스가 진정한 가치임을 알려주기에, 인생과 마라톤은 닮은 점이 많다.

국민 마라토너라는 타이틀을 빼놓을 수 없는 이봉주 스포츠해설가. 우리는 붉게 물든 담쟁이덩굴이 건물을 빼곡하게 채워 완연한 가을임을 알리는 서울 손기정기념관 앞에서 만났다. 오랫동안 방송매체에서 만나왔기에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던 첫 만남. 이봉주 해설가는 수수한 웃음으로 인사를 청해왔다.

“손기정기념재단 이사를 지내고 있지만, 기념관에 방문한 것은 꽤 오랜만입니다. 한국 올림픽 역사, 그리고 마라톤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손기정 선생님을 저 또한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어요. 손기정 선생님은 여러 면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신 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마라톤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손기정 선생님께서 아주 지대한 영향을 줬죠. 그 무엇보다 마라톤 선배이시기에, 그것이 제게 더욱 긍정적인 영향으로 다가왔지요.”

우리 국민들은 올림픽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라톤에 남다른 인상을 가지고 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시작된 경기. 손기정은 영광의 금메달리스트였지만 암흑기였던 조국의 그늘 아래 우울한 우승자가 되어 월계수 나무로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다.

“손기정 선생님의 이야기는 영원히 우리들 마음속에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올곧은 마음과 굳건한 정신, 그 자체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이었는데, 마라톤 우승은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엇이 있었지요. 물론 당시 선생님은 다른 금메달리스트와는 다르게 환호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그 시대적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한 원동력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불혹, 그리고 마흔한 번의 풀코스
손기정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서울 중구 만리동의 손기정체육공원.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7년 9월 18일 조성된 곳이다. 광장과 산책로, 노인정과 놀이시설 등 주민들이 생활 속에서 친밀하게 이용할 수 있는 체육공원으로 자리하고 있다. 손기정기념관 1층에 손기정 선수의 유품과 인생의 기록, 문화재로 지정된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보물 제904호,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는 작지만 역사의 한 부분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관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마라톤은 스포츠 경기로서도 의미가 있지만,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는 점에 있어서도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유물로는 처음으로 보물로 지정된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 손기정 선생님이 마라톤 우승 후 히틀러로부터 받아온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5호 월계수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손기정 정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선생님의 올곧은 정신이 바로 역사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시관을 둘러보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전시관을 빠져 나와 가을 오후의 햇살을 온몸으로 느끼며 이야기를 더 나눴다. 2년 전인 2009년 3월. 그는 마라토너 인생의 마지막 경기에 출전했다. 불혹의 나이였다. “생각해보면, 1996년에 열렸던 애틀란타올림픽이 긴 선수생활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때 은메달을 받았는데, 금메달을 받은 선수의 기록과 3초 차이였어요. 그때 일을 이야기 할 때마다 ‘3초의 한’이라고 하죠. 그때 아쉬움이 많이 남았어요. 그래서 늘 경기를 뛸 때마다 3초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 덕에 선수생활도 길어진 것 아닌가 싶어요.” 더 빠른 기록, 더 나은 기록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스포츠 세계이기에 한국 신기록도, 세계 신기록도 나름의 가치가 있는 법이지만 마흔 살의 나이로 마흔 한 번의 완주기록을 세우는 것 또한 특별한 가치가 있다. 마라톤 세계 신기록 보유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완주기록이라고 하니, 그가 그동안 수없이 자신과 싸우며 달렸을 길고 긴 레이스가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지척에 손기정 선수의 월계수를 두고, 공원에 있는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이봉주 해설가를 알아보고 연신 이야기를 건네고 사진 찍기를 청한다. 워낙 친근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최근 과감한 모습을 보여줬던 예능 도전이 더욱 명실상부한 국민 마라토너를 만든 게 아닐까.

“촤근에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었죠.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지금까지 춤을 접해본 적 없었는데. 저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었고, 그래서 더욱 신선하게 접할 수 있었죠..”

삶, 결승점이 없는 마라톤
최근 이어지고 있는 이봉주 선수의 활발한 활동을 보면, 그는 여전히 뛰고 있다. 이제는 승패를 가리는 경기가 아니라 마라톤계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국민 마라토너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시간을 재는 스톱워치도, 결승점도, 승리의 만세도, 환호도 없다. 어쩌면 결승점도 승패도 없기에 더욱 지난할 미래.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봉주 해설가는 특유의 따뜻하고 소박한 웃음으로 후진 양성에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지금 저는 갈림길에 서 있어요. 어떤 방향으로 전념해 나갈지 결정 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길을 가더라도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바로 마라톤계가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과 후진 양성이지요. 홍보활동을 할 지, 지도자가 될 지 지금은 전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목표를 반드시 이루어낼 것이라는 점입니다.”

가을해는 그리 길지 않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계절에 무르익은 가을 햇빛이 천천히 기운다. 인터뷰를 마치고 손기정 기념관에 볼 일이 있다며 발걸음을 떼는 이봉주 해설가의 뒷모습을 보며, 어쩌면 역사 속의 손기정 정신과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이봉주 정신은 ‘올곧음’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계절의 순환처럼 이봉주 선수의 끈기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회고되고, 기억될 것이다.

글ㆍ박세란 사진ㆍ최재만

출처:월간 문화재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