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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삼국통일의 교두보, 삼년산성의 비밀
글쓴이 tntv 등록일 [2011.11.14]


삼국통일의 교두보, 삼년산성의 비밀
충북 보은에 세워진 신라의 산성, 삼년산성.
1500년이 흘렀지만 그 웅장한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다. 삼년산성은 470년 신라 자비왕 대에 3년에 걸쳐 장정 3천 명을 동원해 공사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신라는 한강진출이 유리한 교통의 요지에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견고함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산성을 쌓는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출발은 늦었지만 200년 앞서 통일을 준비하는데 ….

1. 최고를 자랑하는 삼년산성

삼년산성은 외벽과 내벽 사이가 흙이 아닌 돌로 채워져 그 견고함은 당대 최고 수준이다. 크고 작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는데 작은 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산 정상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세워져 있는 이 성벽만으로도 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성벽 바깥쪽으로는 바로 깊은 계곡이 있어 정해진 길이 아니면 성벽까지 오르지 못하는 구조이다.


2. 전략적 요충지

5세기 후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맞댄 곳이 보은 일대, 삼년산성이 세워진 지
점이었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보은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백제에게 있어 보은은 한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신라가 이 싸움에 뛰어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삼년산성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은 현장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3. 난공불락의 요새

산성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 침략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일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대결하던 시대에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산성이었다. 거의 모든 전투가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견고한 성을 확보하고 있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따라서 삼국은 성을 쌓은 일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여겼다. 취재팀은 삼년산성을 조사하면서 여러 곳에서 신라인들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은 결코 단순한 성이 아니었다.


4. 백제 성왕을 죽이다

삼년산성을 세운 지 100여 년 뒤, 삼년산성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신라의 통일전쟁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바로 삼년산성 출신의 한 장수가 백제 성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백제의 왕을 역사상 크게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한 장수가 죽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삼년산성의 역할과 삼년산성을 지키던 신라 장수들의 수준을 말해주는 진흥왕 15년. 사건이 일어났던 그때로 돌아가본다.


5. 신라의 대역사, 삼년산성

3년이나 걸려 만들어진 성, 성을 보수할 때 장정 3천 명을 동원했던 성, 신라는 어떻게 이런 대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486년 신라는 삼년산성을 개축하면서 일선계에서 3천명을 동원했다. 고구려가 최고 전성기에 동원한 군사력이 30만 명, 백제나 신라의 경우 10만 명이 채 안되었음을 놓고 볼 때 보은의 삼년산성을 축조하면서 3천 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공사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신라는 삼년산성을 통해 두 가지 목표를 이루어낸다.


6. 200년을 앞선 신라의 통일 행보

삼년산성을 지은 200년 후, 신라는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통일을 향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삼년산성의 진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와 협상을 마무리 짓고, 백제 사비성을 향해 진군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비성을 함락 시켰다. 그로부터 5일 뒤,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은 축하행사가 한창이던 사비성을 뒤로하고 삼년산성으로 향했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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