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에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찾다
학기가 시작된 대학가는 분주하고 빠른 발걸음이 거리에 넘쳤다.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에 쉬어갈 공간을 찾기 힘들고, 누구나 바쁜 모습 속에서 여유를 찾을 수 없는 삶의 흐름이 있다. 하지만 성균관대학교 정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서울 문묘와 성균관의 진입로를 김동화 작가와 천천히 걸으며, 말갛게 고개를 내밀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옛 시간의 잔영과 만났다.

문묘와 성균관의 너른 앞마당에 들어서니, 일순 주변이 고요해진다. 오로지 귓가를 스치는 것은 김동화 작가와 내딛는 발걸음의 흙 밟는 소리,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청명한 새 소리와 풀벌레 소리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백미白眉는 바로 여백이다. 조금만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면 아주 화려한 문양의 단청이 있지만, 또 조금만 고개를 내려 아래쪽을 바라보면 단순하고 편안한 색깔이 채우고 있다. 화려함과 단순함을 모두 품고 있기에 시야가 번잡하지 않다.

“최고의 인테리어는 무無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로는 ‘채우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문가들은 ‘비우는 것’이 최고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말은 즉, 적절히 비워진 공간이 사람을 가장 편안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수백 년 전, 유생의 삶이 되살아나는 상상력의 공간
성균관의 앞마당에 들어서자 앞쪽으로는 ‘윤리를 밝히는 집’이라는 뜻의 명륜당明倫堂이 보이고, 양 옆으로는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서재東·西齋가 낮고 길게 뻗어 내리고 있다. 그리고 앞마당 중앙에는 딱 보기에도 수백 년은 됨직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59호)가 아주 오랜 시간동안 문묘와 성균관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이 바로 조선의 최고 엘리트들이 다닌 길 아닙니까. 하루에도 수도 없이 식당에 가고, 학문을 배우는 강당에 가고, 또 기숙사로 돌아오고, 사색하고 암기하며 걸었을 거예요. 일반 한량들이 아니라 학문을 배우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을 유생들의 공간이니 이런 흔적이 굉장한 거죠. 이곳에 아무리 좋은 타일을 깔고, 꽃을 심어놓는다고 하여도 이런 감동이 배어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일부러 성균관의 너른 앞마당을 보기 위해서 입구 쪽으로 걸어가 이야기를 나눴다. 김동화 작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아닌 게 아니라 차분한 자세로 마당을 걸어 다니는 옛 시대 유생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히 나타난다. 아마도 푸르게 동이 트는 새벽녘이면, 밥 짓는 냄새가 나기도 전에 유생들이 글 읽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렸을 것이다. 광대한 서사를 함축하여 그림과 대화로 풀어내는 만화, 그리고 만화가 김동화. 어쩌면 이곳을 눈에 담은 그의 마음속에, 상상력으로 되살린 유생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아니, 분명히 아득한 옛 시간을 가늠하는 그의 눈빛에서 열의에 찬 유생의 모습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참 소소하고 담백합니다. 요즘 빈티지가 유행하고 있지요. 하지만 아무리 예스럽게 만든다고 해서 이런 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 공간에 있었던 우리 선조들의 삶이, 바람이, 시간이 만든 것이니까요. 사용자들에 의해서 이미지와 분위기가 만들어지니, 문묘와 성균관을 채운 우리 선조들의 삶이 얼마나 청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대중예술
아마도 유년시절에 만화방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동화 작가와 그의 만화가 머릿속에 추억과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에는 여학생들의 마음을 울리는 순정만화(『내 이름은 신디』, 『요정핑크』 등)로 이목을 끌었다. 그 뒤에는 소년만화(『곤충소년』 등)로, 또 이후에는 우리만의 미학과 감성, 이야기를 담은 어른만화(『향토빛 이야기』, 『기생 이야기』, 『빨간 자전거』)를 그리면서 파격과 변화를 추구했다. 작품의 흐름에는 ‘꼭 그리고 싶은 것,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라는 다짐이 내포되어 있었고, 그 저변에는 세상과 삶에 대한 마르지 않는 호기심이 있었다.

“한국 만화에는 대체로 양복을 입거나 선글라스를 쓴 서양인을 닮은 8등신 주인공이 나왔습니다. 한국적인 이미지를 최초로 사용한 것이 1996년 작 『황토빛 이야기』였는데, 두 눈이 짝 찢어진 모녀가 나오니, 만화계나 일반 독자들에게 굉장한 파격이었지요. 그 작품은 프랑스, 미국, 스페인 등 11개국에 출판되었는데 우리나라보다도 더 반응이 좋았어요. 만화에서는 이미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는 ‘우리’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상당히 충실했어요. 그 그림과 작품의 모티프는 목판화에서 비롯됐죠. 물론 목판화는 선이 굵고 내 그림은 선이 얇다는 큰 차이점이 있지만, 여백이나 공간에 대한 것을 목판화에서 차용했어요. 그 작품을 통해 내가 정말 표현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됐죠.”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만화가 대표하고 있는 대중예술의 힘이다. 또한 그의 손을 통해서 표현되는 유려한 선, 한국적인 서정이 만들어내는 것은 즉, 만화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다. 그는 말한다. 대중문화와 예술 속에는 그 시대상이 담겨 있다고. 그렇기에 만화가 가지고 있는 파급성과 한계 없는 서사성은 대중예술의 미래와 보조를 맞추며 걷고 있다. “언젠가 경주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박물관에 가보니, 귀면상이라는 것이 있더라고요. 여러 개가 앞에 있었는데, 설명해주시는 분이 이 귀면상들 중에서 어떤 게 초기에, 어떤 게 말기에 제작되었는지 맞춰보라 하더라고요.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입디다. 하나는 굉장한 힘이 느껴지는데, 다른 하나는 비굴한 무엇이 있었어요. 도공이 비굴한 마음으로 한 게 아니라, 시대정신이 그랬다는 것이 자연스레 표현된 것이지요. 만화에도 우리의 시대상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더욱 성장할 수 있는 대중예술인 것이지요. 일면에는 우리의 삶을 담아내고 있으니까요.”

김동화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아주 새로운 공간으로 다가온다. 그곳은 누구나 상상력 하나만으로 무대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어떤 문화재가 그렇지 않으랴. 문화재는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담아내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무대가 아닐까.

여름날씨 같았던 초가을 더위에 지친 우리는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만화의 미래를 가늠하고, 만화와 유년을 함께 했던 추억을 나누다가 작가는 오랜만에 대학가에 나왔으니 둘러보고 가야겠다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는 사물 하나하나를 뜯어보듯 천천히, 그리고 진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글·박세란 사진·최재만

출처:월간 문화재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