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미술관의 시작

미술관의 발단은 필라델피아 시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1876년 개최한 미국 최초의 만국 박람회였다. 이 박람회에서는 전화기, 타이프라이터, 토마토 케첩 등 근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기계와 물품들이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세계 각지의 미술과 공예품이 전시되었는데, 이 미술·공예 전시관이 이듬해인 1877년 미술관으로 전용, 개관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전시되었던 동양 미술·공예품들이 미술관의 소장용으로 구입되거나, 일반에게 구입되어 후일 기증되는 등 현재 동양 소장품의 근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관이 현재의 위치로 신축 이전한 것은 1928년의 일이다.

기증품을 근간으로 성장한 한국 유물 컬렉션

1903년 미술관 최초의 한국 유물인 분청 접시가 기증된 이래, 지난 100여 년 동안 꾸준히 소장품이 늘어나 현재는 약 350여 점을 헤아린다. 종류로는 대부분 해외 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절반 정도의 도자기와, 그 외에 회화, 공예품, 가구 등 대략 4세기에서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두 개의 갤러리에 50여 점을 선정하여 상설 전시하고 있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은 중국이나 일본 미술의 경우처럼 몇 백 점에 달하는 대량은 아니지만, 초기부터 간간이 지역 인사들로부터 중요한 한국 유물을 그룹으로 입수하는 행운이 있었다. 그 시작은 고고학자였던 펜실베이니아대학교 허만 힐프렉트(Hermann V. Hilprecht) 교수의 소장품으로, 1929년과 1945년 두 차례에 걸친 기증 유물에는 고려 청자와 토기, 평양 받닫이 등 20여 점의 한국 유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0년 대에는 필라델피아 지역의 미술 애호가이자 수집가였던 사뮤엘·베라 화이트(Samuel S. and Vera White) 부부로부터 <석가불회도>, <연파당대사도>, <철성도> 등과 같은 중요한 19세기 조선 불화들을 기증받기도 하였다.

또다른 조선 불화 <송제대왕도> 역시 필라델피아 지역의 교육, 문화 후원으로 유명한 러딩턴(Ludington) 가문으로부터 1970년에 기증받은 작품이다. 미술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불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이 그림은 18세기에 그려졌고, 사후 삼칠일, 즉 21일 째에 망자를 심판하는 송제대왕과 지옥의 장면을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당시에 함께 기증된 <봉황·공작도> 쌍폭도(도판 6, 7)는 미술관의 중요 회화 작품 중 하나이다. 오른 쪽 폭은 해, 봉황, 오동나무, 대나무가지, 모란 등을, 왼쪽 폭은 달, 공작, 복숭아 나무, 대나무 가지, 영지 버섯 등을 정확히 대칭되는 구도로 그린 종이 바탕에 설채로 그려진 이 그림은 낙관이나 제발이 없어 정확한 시대나 작가를 알 수 없지만, 뛰어난 세부 묘사와 화려한 채색, 숙련된 화법과 균형있는 구도 등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어 화원에 의해 궁중 소용으로 제작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그림들은  상태가 좋지 않아 그 동안 전시를 할 수 없었으나 지난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지원으로 2008년 한국에서 보존처리를 마친 후 새롭게 장황裝潢되었다.

소장품 확장의 전기

필라델피아미술관의 한국 소장품 확장에 큰 전기가 마련된 것은 스티븐 맥코믹(Colonel Stephen McCormick, 1912-2003) 대령이 기증한 100여 점의 유물을 통해서이다. 맥코믹 대령은 콜럼비아 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건축학도로, 1950년대 중반 2~3년간 서울 인근에서 근무했다. 서울로 가기 전 보스턴미술관에서 처음 대면한 아름다운 한국도자기들에 매료된  이 젊은 건축학도는 한국에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한국 미술품을 수집하게 된다.

건축가로서의 자신의 관심사에 들어맞았던 기와를 시작으로 청자와 백자 등을 수집하였고 이후 점차 회화나 가구류에까지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1985년부터 2003년 사이 여러 차례에 걸친 그의 기증 유물은 삼국 시대 기와, 고려 청자, 조선 백자 그리고 조선 시대의 가구와 병풍화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맥코믹 대령에 의하면 적지 않은 재원을 바탕으로 하고, 그보다 큰 열정과 애착이 묻어 있는 소장품을 미술관에 기증하기까지에는 젊은 일가 후손들에게 물려줄까 하는 갈등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평생 아름다운 예술품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준 나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소장품을 미술관에 기증하기로 결심했고, 이를 통해서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고자 함은 물론이고 특히 이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조국의 존재를 눈과 마음으로 인식시켜 주기를 바랐다.

지속적인 유물 구입

필라델피아미술관은 이러한 기증 뿐 아니라 지속적인 구입을 통해서도 한국 소장품 확장에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구입 유물로는 <청화백자용문호(도판 10)>, <청자음각연화문매병(도판 11)>, <백자유개호(도판 4)> 등을 들 수 있다. 1950년에 구입한 <청화백자용문호>는 당당한 형태와 크기, 유려한 솜씨로 힘차게 그려낸 용무늬가 어우러져 18세기 용항아리의 세련되고 단정한 멋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청자 매병> 또한 12세기 청자 전성기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수작으로 균형 잡힌 기형과 정교한 음각무늬, 맑고 아름다운 비색이 단연 돋보인다. 이 작품은 재정가로 유명한 피에르폰트 모건(J. P. Morgan)이 한때 소장하였던 것으로 1911년에 출판된 그의 개인 소장품 도록 제2권에 실려 있다(제2권에 실린 소장품들은 1905년과 1910년 사이에 구입된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도록에서는 이 매병을 중국 원대의 것으로 소개하고 있어 당시 한국 미술에 대한 제한적인 지식의 단면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박물관에 입수되었고, 1974년 필라델피아미술관이 구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장 최근인 2010년에 구입한 15세기 말~16세기 초의 <백자호>는 18세기 이후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량이 적은 조선 초기 작품으로 그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미술관은 지난 10여 년간 상대적으로 수량이 적은 회화 작품 구입에 중점을 두어 여러 점의 병풍화와 수묵화 등을 소장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02년에 구입한 <책가도(도판 2)>는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책가도 혹은 책거리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그림은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애호되었던 병풍의 하나로 붓, 벼루, 종이 등의 문방구나 책, 혹은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진귀한 물건들을 그린 그림을 이른다. 주로 선비들의 서재를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학업에 정진하여 벼슬에 나가고자 하는 소망을 담기도 하였다. 기물들이 선반에 나열된 형식, 아래위로 쌓인 형식 그리고 이 작품처럼 개별적으로 나열된 형식들이 있다. 그림에 보이는 서양식 시계로 미루어 19세기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정교한 필치와 아름다운 채색을 드러내고 있다.

해외의 한국 유물

지난 15년간 미국의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는 필자가 미국 미술관을 찾는 한국 관람객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은 한국실은 중국실이나 일본실에 비해 규모도 작고 별 볼거리도 없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눈에 띄게 훌륭한 한국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면 왜 이런 작품이 해외에 나와 있는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못내 서운한 말이지만,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몸소 그렇게 느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해서 그러려니 들어 넘기고는 한다. 문제의 본질은 당장 눈에 보이는 전시실의 규모를 비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미술관은, 국고에서 지원되는 국공립 박물관·미술관, 사재로 운영하는 사립 박물관·미술관의 이분 구조인 한국과는 달리 매우 다양한 재원 확보를 통해 운영된다. 개인, 기업, 재단의 기부금이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소장품 또한 70% 이상이 기증품에 의존하고 있다. 한마디로 소장품 규모가 작고 재원 확보가 안 되면 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매우 간단한 논리인 것이다. 미국 내 미술관의 한국 소장품은 예외 없이 매우 작은 규모에서 출발하였고,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나 겨우 몇 백 점을 헤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중국이나 일본 미술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여러 지원과 관심으로 미국 내 한국 미술의 입지는 나날이 넓어지고 있으며 여러 미술관들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유물들이 그 초석이 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비록 이국에 있지만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첨병이 되어준 이 유물들의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에 힘써야 할 것이다. 

글 · 우현수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한국미술큐레이터    사진 ·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출처:월간 문화재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