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악禮樂, 봉건전통시대 통치의 수단

『예기禮記』의 「악기樂記」는 조선시대 정재에 담지된 예악사상을 이해하기에 유용한 문헌이다. 이 고서에는 예악의 성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악은 천지의 조화이며, 예는 천지의 질서이다樂者, 天地之和也 , 禮者 , 天地之序也.” 악을 통해 세상의 조화로움을 꾀하고 예를 통해 세상의 질서를 구현한다는 뜻이 깃들어 있다. 예로부터 예와 악은 천지의 조화와 구별을 상징하는 요체로 인식되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기존 질서의 조화와 안정을 이루기 위해 예악은 반드시 필요한 덕목으로 중시되었다. 음音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따라 인간과 동물로 구분되기도 하고 악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되기도 했다. 이처럼 사회 모든 규범이 예악으로 설명되었다.

예악에 담지된 등급관념은 주대奏代 일무佾舞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일佾은 나열한다는 뜻으로, 열列을 의미한다. 즉 행렬行列인 것이다. 춤의 행렬의 수는 의식의 규모나 사용자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각기 차이가 있었다.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 따라 춤추는 행렬의 규모가 달랐음은 봉건통치를 보다 견고히 하기 위한 고도의 지배전략이었다.

‘예악의 제도화’ 왜 필요 했나

봉건전통시대 지배이념이 구현된 대표적인 춤은 바로 정재였다.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조선은 왕조 탄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억불숭유(抑佛崇儒,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것.)를 국시로 삼았다. 유가이념을 토대로 예악이 제도화되었고 춤과 음악을 관장하는 여러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성리학적 유교문화를 숭상하고 발현하기 위한 창조적 행위들이 잇따랐고, 그런 흐름에서 많은 정재들이 새롭게 창작되었다.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있어 중국 고대 예악사상이 유의미하게 차용되었음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건하는 데 기여한 많은 개국공신들이 조선전기 공연문화의 정책 수립과 무악을 창작하는 데 직접 참여했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정도전을 비롯 하륜, 권근, 최항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당대 최고 지식인이자 새로운 정권 창출에 기여한 일등공신들이었다. 

특히 정도전은 조선창건 직후 태조의 공덕을 치하하는 뜻에서 직접 악가를 짓고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 등의 정재를 창제하여 왕에게 헌정하였다. 하륜은 근천정, 수명명 등을 창제하는 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악학이 설치되는 데 산파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조선 초 정재는 태조 이성계와 그를 보좌한 개국공신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추구된 정치성을 띤 예술이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몽금척과 수보록은 특히 눈여겨볼 만한 정재로 주목된다. 몽금척은 정도전이 악장을 짓고 이를 바탕으로 정재로 꾸며진 작품이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잠저(潛邸, 나라를 세우거나 임금의 친족에 들어와 임금이 된 사람의, 임금이 되기 전의 시기 또는 그 시기에 살던 집.)에 머무를 때 꿈에 신인이 나타나 문무를 겸비하고 백성들의 신망이 두텁겠다고 하면서 금척을 주었다는 설에 기원한다. 이는 이성계가 원래 왕이 될 자질이 있는 인물이며, 그가 왕이 된 것은 곧 천명天命을 받든 것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된다. 수보록 또한 이런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태조가 왕이 되기 전 어떤 사람이 지리산 석벽石壁에서 얻은 것이라며 이상한 책을 주었는데, 여기에 그가 왕이 될 자질을 타고났다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몽금척과 수보록의 내용 모두 태조의 집권이 곧 하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이른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담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 천天은 우주만물의 근본을 형성하는 중심축으로 이해되었다. 천은 만물의 이치를 통섭하고, 인간은 그의 주재 아래 놓여진다. 천의 주재력은 정권의 흥망과 밀접히 관계되며, 한 정권의 흥망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으로서 오로지 천만이 행할 수 있는 특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이 창건된 것은 오로지 천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성계가 왕이 된 것 또한 천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왕위에 오르기 전 이성계가 꿈에 금척을 받았다는 것과 지리산 석벽에서 이서인 보록을 받은 것은 모두 그가 왕이 된다는 사실을 미리 예견한 사례다. 이렇듯 몽금척, 수보록은 조선창건이 하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의도적으로 주입시킴으로써 정권을 절대화하고 봉건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창작된 정재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 ‘정재 황금기’의 비밀

조선후기 순조대는 무려 23종의 정재가 새롭게 창작되어 이른바 ‘정재 황금기’를 이룬 시기이다. 정재는 대개 국가에서 치르는 궁중연향을 계기로 창작되고 공연된다. 조선시대 궁중연향은 나라를 이끌어가는 통치집단인 군신 간 또는 왕실 내부의 친목과 연대감 조성을 위해 매우 중요한 행사로 간주되었다. 왜 이렇게 많은 정재가 순조대에 창작되었을까?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자 그의 아들이 겨우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이다. 그런데 왕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에서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외척인 김조순이 권세를 누린다. 김조순으로 대변되는 안동김씨 일파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낀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맡게 하고 자신은 정치일선에서 퇴진한다. 현실 정치에 한계를 느낀 순조가 왕실의 권위와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방책이었다.

이에 효명세자는 외척 중심의 정치 질서를 타파하고자 인사권과 군사권을 총괄하던 권력의 핵심기구 비변사를 장악하고 개혁적 성향의 실학자들을 등용하여 개혁의 토대를 마련한다. 또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대규모의 궁중연향을 베풀고 새로운 정재 창작에도 깊이 관여한다.

눈여겨 볼 점은 이 시기 창작된 23종의 정재 중 무려 20여 종이 예제睿製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예제란 원래 왕세자나 왕세손이 지은 글을 말한다. 가령 예제정재라 함은 왕세자나 왕세손이 지은 시문詩文을 뜻한다. 이 시문은 곧 정재악장, 즉 창사唱詞를 의미하는 것이다. 효명세자는 장악원掌樂院 소속의 악인들 이외 민간의 가객들을 궁중에 불러들여 시가를 짓고 악장을 창작하는 데 참여시켰다. 조선후기 정재의 새로운 미적 전형典型이 창출된 것은, 효명세자의 열린 의식과 창의적 발상의 소산으로 풀이된다.

궁중정재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로 구분된다. 당악정재는 반드시 죽간자(고려·조선시대 당악정재 연주 때 사용된 춤추는 도구의 일종)와 구호(노래의 절과 절 사이에 뜻없이 부르는 노래), 치어(궁중음악에서 악인이 풍류에 맞추어 올리는 찬양의 말)가 따르고 의물이 등장하며 당악반주에 한문가사를 노래한다. 여기에 반해 향악정재는 죽간자와 의물 등이 생략되고 음악 또한 향악을 연주하며 우리말 가사를 노래한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러 이러한 기준이 무너졌다. 당·향악정재의 형식 차이가 모호해지거나 ‘당악정재가 향악정재화’하는, 소위 ‘퓨전화’ 현상이 나타났다. 또 정재의 주제와 소재가 다양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표현기법의 외연이 넓어졌다. 무엇보다 무용수의 자유로운 감정의 발산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미학적 파격은 춘앵전春鶯과 무산향舞山香에서 포착된다. 독무로 추는 춘앵전은 6자 크기의 화문석 위에서 춤춘다.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 앵삼을 착용하는 춘앵전은 화전태花前態의 미롱眉弄이 백미로 꼽힌다. ‘꽃 앞에 선 태도’로서, 무용수가 활짝 웃는 모습은 그 자체로 파격에 가깝다. 예禮와 엄격한 형식을 중시한 궁중연향에서 특히 왕 앞에서 춤추는 무용수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산향 또한 춘앵전 못지 않는 파격적 실험으로 관심을 모은다. 대모반이라는 제한된 무대공간 속에서 추는 무산향이다. 연속적인 회무回舞로 이어지는 연풍대 동작이 압권이다.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 즉 정중동靜中動적 내밀함이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던 정재의 공연어법에서 연풍대 동작은 아담함과 바름을 넘어서는 하나의 미학적 실험으로 읽힌다. 

이렇듯 효명시대 ‘창작의 자율성’이 구현된 정재 공연미학은 다층적 양상을 보여준다. 가령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거나 사물이나 대상을 보고 춤으로 표현했다. 특별한 주제 없이 춤의 기교만으로 안무된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렇듯 다양한 미적 층위를 내포하고 있지만 나라의 태평성대를 축원한다는 본래의 목적은 희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창적인 주제와 소재, 우회적 상징과 암시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정재에 담지된 본래 예악사상의 기조는 그대로 지켜졌다. 

효명세자는 세도정치로 내몰린 혼란한 정국을 타개하고 왕권강화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대규모의 궁중연향을 개최하고 다양한 정재를 창작했다. 이는 악樂을 진작시켜 백성을 교화하고 천하의 도道를 넓혀야 한다고 인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예악사상이 깃든  조선시대 왕궁문화를 표상하는 정재 대부분이 조선후기 효명세자에 의해 창작되었음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시대 정재, 즉 궁중무용은 이렇듯 단지 몸짓 언어에 머물지 않고 당대에 추구한 통치이념과 철학, 시대정신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는 정신적 가치의 산물이었다. 

글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사진 · 춤자료관 연낙재, 연합콘텐츠

출처:월간 문화재 사랑